ETC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의 역사와 변천사

Neural Center 2025. 5. 25. 19:02
반응형

한국의 산업안전보건법은 1981년 제정 이후 44년간 우리나라 산업 발전과 함께 끊임없이 진화해왔다. 각 시대마다 발생한 주요 산업재해와 사회적 변화에 대응하며 개정을 거듭해온 이 법의 변천사는 곧 우리나라 산업안전보건 정책의 발전사이기도 하다. 특히 2019년 전부개정은 법 제정 이후 가장 큰 변화로 평가받으며, 현재까지도 그 영향이 지속되고 있다.

제정 초기 1980년대: 산업화의 그림자

1981년 산업안전보건법이 처음 제정될 당시 우리나라는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의 한복판에 있었다. 1970년대 급속한 경제성장 과정에서 안전에 대한 고려는 뒷전으로 밀려났고, 그 결과 산업재해율이 급격히 증가했다. 1978년 인구 1만 명당 산업재해자는 37.7명으로 당시 선진국 대비 3-4배 높은 수준이었다.

초기 산업안전보건법은 매우 기본적인 수준의 안전기준만을 제시했다. 적용 범위도 제조업과 건설업 등 일부 업종에 한정되었고, 사업주의 의무도 최소한의 안전장치 설치 수준에 머물렀다. 당시만 해도 '안전은 비용'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으며, 정부도 경제성장을 위해 어느 정도의 산업재해는 감수해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1982년 구로공단 화재사고, 1983년 대한항공 여객기 추락사고 등 대형 참사가 연이어 발생하면서 안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개정은 주로 처벌 조항 강화와 감독 체계 정비에 초점을 맞췄다.

1990년대: 민주화와 노동운동의 영향

1987년 민주화 이후 노동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산업안전보건에 대한 근로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특히 1988년 원진레이온 직업병 사건이 사회적 충격을 주면서 직업병 예방과 근로자 건강권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증가했다.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수많은 근로자가 정신장애를 앓게 된 이 사건은 화학물질 관리와 작업환경 개선의 중요성을 일깨워줬다.

1990년 개정에서는 작업환경측정제도가 도입되었다. 사업주가 정기적으로 작업환경을 측정하고 그 결과에 따라 개선조치를 취하도록 의무화한 것이다. 또한 특수건강진단제도도 체계화되어 유해업무 종사자에 대한 건강관리가 강화되었다.

1995년 개정에서는 안전보건관리체제가 대폭 개편되었다. 일정 규모 이상 사업장에서는 안전관리자와 보건관리자를 의무적으로 두도록 하고, 안전보건위원회를 설치하여 노사가 공동으로 안전보건 문제를 논의하도록 했다. 이는 안전보건이 사업주만의 책임이 아니라 노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과제라는 인식의 전환을 보여준다.

2000년대: 글로벌 스탠다드와 시스템 안전

2000년대 들어서면서 우리나라 기업들의 해외 진출이 본격화되었고, 국제적 수준의 안전관리 시스템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2003년 개정에서는 안전보건경영시스템(KOSHA-MS) 도입 근거가 마련되었다. 이는 ISO 45001과 같은 국제 안전경영시스템 표준과 연계하여 체계적이고 예방적인 안전관리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2006년 개정에서는 위험성평가제도가 처음 도입되었다. 사업주가 사업장의 유해·위험요소를 파악하고 위험성을 평가하여 적절한 예방조치를 취하도록 의무화한 것이다. 이는 사후적 처벌 중심에서 사전적 예방 중심으로 정책 패러다임이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시기의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정신보건 영역의 확대다. 2007년 개정에서는 직무스트레스로 인한 건강장해 예방 조치가 신설되었다. 산업구조가 제조업 중심에서 서비스업 중심으로 변화하면서 육체적 위험뿐만 아니라 정신적 건강 위험도 중요한 관리 대상이 되었다.

2010년대: 대형 참사와 패러다임 전환

2010년대는 우리나라 산업안전사에 있어 뼈아픈 교훈을 남긴 시기다. 2014년 세월호 참사, 2015년 메르스 사태, 2017년 제천 화재사고,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사망사고 등 대형 참사가 연이어 발생하면서 안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특히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비정규직 근로자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한 사고는 큰 사회적 충격을 주었다. 이 사고를 계기로 하청업체 근로자의 안전보건에 대한 원청업체의 책임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또한 위험의 외주화 문제, 즉 위험한 작업을 하청업체에 떠넘기는 관행에 대한 비판도 거세졌다.

2014년에는 화학물질 관리 체계가 대폭 강화되었다. 구미 휴브글로벌 불산 누출사고(2012년)의 교훈을 반영하여 화학물질 등록·평가제도가 도입되고, 공정안전관리(PSM) 대상 사업장이 확대되었다. 또한 화학물질의 유해성·위험성 정보 제공 의무도 강화되어 근로자의 알 권리가 보장되었다.

2019년 전부개정: 패러다임의 대전환

2019년 1월 15일 시행된 전부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은 법 제정 이후 가장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 개정은 단순한 조문 수정 수준을 넘어서 산업안전보건 정책의 기본 틀을 바꾸는 혁신적 변화였다.

가장 큰 변화는 적용 범위의 대폭 확대다. 기존에는 5인 이상 사업장에만 적용되던 많은 조항이 1인 이상 모든 사업장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업종별 적용 제외 조항도 대폭 줄여서 거의 모든 업종에 법이 적용되도록 했다. 특히 서비스업의 적용 범위 확대는 산업구조 변화를 반영한 중요한 조치였다.

도급 관계에서의 안전보건 책임도 크게 강화되었다. 원청업체는 하청업체 근로자의 안전보건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의무를 지게 되었으며, 위험작업의 도급 금지 범위도 확대되었다. 이는 위험의 외주화를 방지하고 실질적 사용자에게 안전보건 책임을 묻겠다는 정책 의지를 보여준다.

근로자의 참여권도 대폭 강화되었다. 근로자대표의 사업장 순회점검권, 안전보건정보 요구권, 작업중지권 등이 명문화되었다. 특히 작업중지권은 근로자가 급박한 위험 상황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으로서 그 의미가 크다.

2020-2025년: 디지털 전환과 새로운 도전

2019년 전부개정 이후에도 산업안전보건법은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다.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은 새로운 유형의 직업건강 위험을 부각시켰다. 감염병 예방을 위한 사업주 의무가 강화되었고, 원격근무와 비대면 업무 환경에서의 안전보건 관리 방안이 새롭게 모색되었다.

2022년에는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면서 산업안전보건법과의 관계 정립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두 법률은 서로 다른 접근방식을 취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같은 목표를 추구하며, 상호 보완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2024년 개정에서는 정신건강 보호 조치가 대폭 강화되었다. 직장 내 괴롭힘, 고객 응대 근로자 보호, 과로 방지 등이 법적 의무로 명문화되었으며, 사업주는 근로자의 정신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는 일과 삶의 균형, 정신건강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정책 패러다임의 변화

44년간의 개정 과정을 통해 산업안전보건 정책의 패러다임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초기의 '사후 처벌 중심'에서 '사전 예방 중심'으로, '최소 기준 준수'에서 '지속적 개선'으로, '사업주 단독 책임'에서 '노사 공동 참여'로 정책 방향이 전환되었다.

또한 '물리적 안전'에서 '포괄적 건강'으로 보호 범위가 확대되었다. 초기에는 기계적 위험, 화재·폭발 위험 등 물리적 안전에 집중했지만, 점차 화학적 위험, 생물학적 위험, 인간공학적 위험, 정신사회적 위험까지 포괄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규제 중심'에서 '지원과 규제의 조화'로 정책 수단도 다양해졌다. 처벌만으로는 안전문화를 만들 수 없다는 인식하에 교육, 컨설팅, 인센티브 등 다양한 지원 정책이 함께 활용되고 있다.

국제적 동향과의 비교

우리나라 산업안전보건법의 발전 과정은 국제적 동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ILO의 안전보건 협약, EU의 기본지침, 각국의 선진 제도 등을 적극 수용하면서 국제 수준에 맞는 법제를 구축해왔다.

특히 위험성평가제도는 EU의 기본지침을 모델로 도입되었고, 안전보건경영시스템은 ISO 45001과 연계하여 국제 표준에 맞게 설계되었다. 화학물질 관리제도도 EU의 REACH 제도를 참조하여 구축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외국 제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한 독창적인 제도도 많이 만들어졌다. 도급관계에서의 안전보건 책임, 원청업체의 하청업체 관리 의무 등은 우리나라의 산업구조적 특성을 반영한 제도다.

미래를 향한 과제

산업안전보건법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변화하는 산업 환경에 대응해야 한다. 인공지능, 로봇, IoT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의 확산으로 새로운 유형의 위험요소가 등장하고 있으며, 플랫폼 노동, 원격근무 등 새로운 고용형태도 확산되고 있다.

고령화 사회 진입으로 고령 근로자의 안전보건 관리도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또한 외국인 근로자의 증가, 성별 다양성 확대 등 인구구조 변화에 따른 맞춤형 안전보건 정책도 필요하다.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의 증가, 신종 감염병의 위험 등 새로운 환경적 요인도 법제에 반영되어야 할 과제들이다.

결론

1981년 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은 44년간 12차례의 전부개정과 수십 차례의 일부개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각각의 개정은 그 시대의 사회적 요구와 산업 환경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우리나라는 세계적 수준의 산업안전보건 법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법의 변천사를 되돌아보면 우리 사회가 안전에 대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교훈을 얻었는지를 알 수 있다. 때로는 대형 참사라는 아픈 경험을 통해, 때로는 선진국의 제도를 도입하면서, 때로는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법은 계속해서 발전해왔다.

중요한 것은 법 개정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점이다. 궁극적 목표는 모든 근로자가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며, 법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앞으로도 산업안전보건법은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계속해서 진화할 것이며, 우리 모두는 그 변화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책임이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