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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숙련자도 실수할까? 라스뮈센의 인간행동 3단계 이론

Neural Center 2025. 5. 23.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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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 일하다 보면 신기한 일을 자주 목격한다. 10년 넘게 해온 베테랑이 아주 기본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모습 말이다. "어떻게 그런 실수를 할 수 있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 모두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해주는 게 바로 라스뮈센(Jens Rasmussen)의 인간행동분류 이론이다. 1980년대 덴마크의 안전공학자 젠스 라스뮈센이 개발한 이 이론은 사람이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하는지를 3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3가지 레벨

라스뮈센은 인간의 인지과정을 기술기반(Skill-based), 규칙기반(Rule-based), 지식기반(Knowledge-based) 행동으로 구분했다. 이 세 가지는 완전히 독립적인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전환되는 연속적인 과정이다.

기술기반 행동 (Skill-based Behavior)

가장 자동화된 단계의 행동이다.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반응하는 수준이다.

특징:

  •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인 반응
  • 감각-운동 패턴이 완전히 내재화됨
  • 빠르고 정확한 수행 가능
  • 거의 노력이 들지 않음

일상 예시를 들면 자동차 운전이 대표적이다. 숙련된 운전자는 클러치를 밟고 기어를 바꾸는 동작을 의식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한다. 컴퓨터 키보드를 치거나,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단계에서는 성능이 매우 높지만 한 가지 함정이 있다. 너무 자동화되다 보니 주의가 다른 곳으로 분산되면 실수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집중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습관적으로"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규칙기반 행동 (Rule-based Behavior)

기존에 학습한 규칙이나 절차를 적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단계다. "이런 상황에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IF-THEN 형태의 규칙을 활용한다.

특징:

  • 저장된 규칙이나 절차를 인출해서 적용
  • 상황을 패턴으로 인식하고 대응
  • 어느 정도 의식적인 판단 과정 포함
  • 기술기반보다는 느리지만 여전히 효율적

회사에서 매뉴얼을 보고 업무를 처리하거나, 비상시 대응 절차를 따르거나, 요리 레시피를 보고 음식을 만드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배울 때도 처음에는 단계별 가이드를 따라하는 방식으로 시작한다.

이 단계에서 실수가 생기는 경우는 주로 두 가지다. 상황을 잘못 인식해서 엉뚱한 규칙을 적용하거나, 올바른 규칙을 알고 있지만 실행 과정에서 실수하는 경우다.

지식기반 행동 (Knowledge-based Behavior)

기존 규칙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새로운 상황에서 의식적으로 분석하고 계획을 세우는 단계다. 가장 높은 수준의 인지과정이 필요하다.

특징:

  • 의식적이고 분석적인 사고 과정
  • 목표 설정과 계획 수립 필요
  • 창의적 문제해결과 학습 발생
  • 많은 시간과 인지적 노력 필요

처음 보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전략적 의사결정을 내리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과정이 여기에 속한다. 예상치 못한 시스템 장애를 분석해서 해결하거나, 새로운 프로젝트의 실행 계획을 세우는 것도 지식기반 행동이다.

이 단계에서는 정보 부족, 시간 압박, 인지적 편향 등으로 인해 판단 실수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3단계가 실제 업무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일상 업무의 동적 전환

실제 업무 환경에서는 이 세 단계가 계속 전환된다. 예를 들어 시스템 운영자의 하루를 보면:

오전 9시 (기술기반): 평소처럼 시스템 상태를 확인한다. 익숙한 화면들을 빠르게 훑어보며 이상 여부를 파악한다.

오전 10시 (규칙기반): CPU 사용률이 80%를 넘는 알람이 발생한다. 기존 대응 매뉴얼에 따라 프로세스를 확인하고 불필요한 작업을 정리한다.

오후 2시 (지식기반): 전에 본 적 없는 새로운 오류가 발생한다. 로그를 분석하고, 관련 문서를 찾아보고, 동료와 상의해서 해결책을 찾는다.

오후 4시 (기술기반): 해결책을 적용한 후 다시 일상적인 모니터링 업무로 돌아간다.

숙련도에 따른 차이

같은 업무라도 숙련도에 따라 어떤 단계를 주로 사용하는지 달라진다.

초보자: 대부분의 업무를 지식기반이나 규칙기반으로 처리한다. 매뉴얼을 자주 찾아보고, 하나하나 의식적으로 확인하며 작업한다.

숙련자: 일상적인 업무는 기술기반으로 처리하고, 예외 상황에서만 상위 단계로 전환한다. 효율성은 높지만 때로는 "자동 조종" 상태에서 놓치는 것들이 있을 수 있다.

전문가: 세 단계를 유연하게 전환하면서도 각 상황에 맞는 최적의 인지 전략을 선택한다.

실수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기술기반 단계의 실수 (Slip)

자동화된 행동에서 발생하는 실수를 '슬립(Slip)'이라고 한다. 의도는 올바르지만 실행 과정에서 실수가 생기는 경우다.

  • 엘리베이터에서 자기 층이 아닌 습관적으로 다른 층 버튼을 누르는 것
  • 이메일을 보낼 때 받는 사람을 잘못 선택하는 것
  • 숙련된 작업자가 집중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순서를 바꿔서 작업하는 것

규칙기반 단계의 실수 (Mistake)

잘못된 규칙을 선택하거나 규칙을 잘못 적용해서 발생하는 실수를 '미스테이크(Mistake)'라고 한다.

  •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상황에 기존 해결책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
  • 예외 상황을 일반적인 케이스로 잘못 판단하는 것
  • 업데이트된 절차를 모르고 예전 방식을 사용하는 것

지식기반 단계의 실수

새로운 문제 해결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다. 정보 부족, 잘못된 가정, 인지적 편향 등이 원인이 된다.

  • 불완전한 정보를 바탕으로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것
  • 확증 편향으로 인해 반대 증거를 무시하는 것
  • 시간 압박 상황에서 충분한 분석 없이 결정하는 것

안전과 효율성을 높이는 실무 적용법

시스템 설계에 활용하기

라스뮈센의 이론을 이해하면 더 나은 업무 환경을 만들 수 있다.

기술기반 행동 지원:

  • 자주 사용하는 기능은 직관적이고 일관성 있게 설계
  • 실수를 방지하는 확인 단계나 되돌리기 기능 제공
  • 중요한 작업에서는 의도적으로 주의를 환기시키는 장치 마련

규칙기반 행동 지원:

  • 명확하고 이해하기 쉬운 매뉴얼 작성
  • 상황별 대응 절차를 체계적으로 정리
  • 정기적인 교육을 통해 규칙을 업데이트

지식기반 행동 지원:

  • 충분한 정보와 분석 도구 제공
  • 협업과 토의가 가능한 환경 조성
  • 시간 압박을 줄이고 신중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여건 마련

교육과 훈련에 활용하기

각 단계별로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

기술 훈련: 반복 연습을 통해 자동화된 행동 패턴을 형성한다. 시뮬레이션이나 실습 위주의 교육이 효과적이다.

규칙 학습: 다양한 상황별 사례를 통해 언제 어떤 규칙을 적용해야 하는지 학습한다. 케이스 스터디나 역할 연습이 도움이 된다.

지식 개발: 분석적 사고력과 문제해결 능력을 기른다. 토론, 프로젝트, 멘토링 등이 유용하다.

개인의 역량 개발에 활용하기

자신의 인지 과정을 이해하면 더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다.

메타인지 개발: 지금 내가 어떤 단계에서 생각하고 있는지 의식적으로 점검한다.

상황 인식: 새로운 상황인지 익숙한 상황인지 판단하고 적절한 인지 전략을 선택한다.

실수 분석: 실수가 발생했을 때 어떤 단계에서 왜 발생했는지 분석해서 재발을 방지한다.

조직 관리에서의 시사점

다양성의 중요성

조직에서는 각 단계에 특화된 사람들이 모두 필요하다. 루틴한 업무를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사람, 매뉴얼과 절차를 잘 따르는 사람, 창의적으로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

업무 배분 전략

개인의 성향과 상황에 맞게 업무를 배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피로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에서는 복잡한 판단보다는 정형화된 업무를 맡기는 게 실수를 줄이는 방법이다.

안전 문화 조성

실수를 개인의 문제로만 보지 말고 시스템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종류의 실수가 발생하기 쉬운지 이해하고, 이를 예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정리하며

라스뮈센의 인간행동분류는 단순해 보이지만 실무에 깊이 있게 적용할 수 있는 강력한 프레임워크다.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실수가 발생하기 쉬운지 이해하면 더 안전하고 효율적인 업무 환경을 만들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이론의 가치는 실수를 단순히 "조심성이 부족해서" 또는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치부하지 않고, 인간의 인지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자신의 업무 패턴을 한 번 되돌아보자. 어떤 일을 할 때 무의식적으로 처리하고, 어떤 일에서는 매뉴얼을 찾아보며, 어떤 일에서는 깊이 고민하는가? 이런 인식만으로도 업무의 질과 안전성을 한 단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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