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실수한다"는 말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하지만 그 실수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분석한 사람은 많지 않다. 앨런 스웨인(Alan D. Swain)은 바로 이런 일을 한 선구자였다. 그는 인간의 실수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휴먼 에러(Human Error) 분류 체계를 만들었고, 이는 오늘날 안전 관리와 사고 예방의 핵심 이론이 되었다.
특히 원자력 발전소, 항공기, 의료기기 등 고위험 산업에서 스웨인의 이론은 생명을 구하는 필수 도구가 되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챌린저호 폭발 사고 등 대형 재해의 원인을 분석할 때도 스웨인의 휴먼 에러 분류가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스웨인은 누구였나?
앨런 스웨인은 1960년대부터 미국 산디아 국립연구소(Sandia National Laboratories)에서 인간 신뢰도 분석(Human Reliability Analysis)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는 냉전 시대로 핵무기와 원자력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던 때였다. 기술은 완벽해 보였지만, 그것을 다루는 인간의 실수로 인한 사고가 계속 발생했다.
스웨인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심리학, 공학, 통계학을 결합한 새로운 접근법을 개발했다. 그는 "기계의 신뢰도를 계산하듯이 인간의 신뢰도도 정량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것이 바로 휴먼 에러 분류 시스템이다.
휴먼 에러의 기본 개념
스웨인에 따르면 휴먼 에러는 단순히 "사람이 실수했다"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모든 에러에는 명확한 원인과 패턴이 있으며, 이를 분석하면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기본 철학이었다.
휴먼 에러를 정의하자면 "인간이 수행해야 할 작업을 올바르게 수행하지 않거나, 수행해서는 안 될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올바른 작업'의 기준이 미리 정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매뉴얼, 절차서, 규정 등이 그 기준이 된다.
스웨인은 휴먼 에러를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분류했다. 하나는 에러의 성격에 따른 분류이고, 다른 하나는 에러의 원인에 따른 분류다.
에러의 성격에 따른 분류
스웨인은 에러의 성격을 누락 에러(Error of Omission)와 수행 에러(Error of Commission)로 나누었다.
누락 에러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실수다. 예를 들어, 항공기 조종사가 이륙 전 체크리스트 중 일부를 빼먹는 경우나, 의사가 수술 전 환자 알레르기 확인을 잊어버리는 경우다. 원자력 발전소에서 정기 점검을 깜빡하거나, 안전밸브 작동 확인을 놓치는 것도 누락 에러에 해당한다.
누락 에러는 특히 위험한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발견하기 어렵다. 문제가 터지고 나서야 "아, 그때 이걸 안 했구나"하고 깨닫게 된다.
수행 에러는 할 일은 했지만 잘못한 실수다. 잘못된 버튼을 누르거나, 잘못된 밸브를 돌리거나, 잘못된 약물을 투여하는 경우들이다. 체르노빌 사고 때 운전원들이 안전 시스템을 잘못 조작한 것도 수행 에러의 대표적 사례다.
수행 에러는 누락 에러보다 발견하기 쉽다. 뭔가 잘못된 결과가 즉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즉각적인 피해로 이어지기도 한다.
에러의 원인에 따른 분류
스웨인은 에러의 원인을 슬립(Slip), 랩스(Lapse), **미스테이크(Mistake)**로 구분했다. 이 분류는 후에 제임스 리즌(James Reason)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지만, 기본 틀은 스웨인이 만들었다.
슬립은 기술적 실수다. 할 줄 아는 일인데 손이나 몸이 잘못 움직인 경우다. 키보드를 치다가 엉뚱한 글자를 누르거나, 엘리베이터에서 3층을 가려다 4층 버튼을 누르는 것들이다. 머릿속으로는 정확히 알고 있는데 실행 과정에서 실수가 일어난다.
랩스는 기억 실수다. 해야 할 일을 아예 잊어버리거나, 중간에 딴 생각을 하다가 놓치는 경우다. 가스레인지를 켜놓고 깜빡하거나, 중요한 회의 시간을 잊어버리는 것들이 랩스에 해당한다. 특히 루틴한 작업 중에 방해를 받으면 랩스가 자주 발생한다.
미스테이크는 판단 실수다. 상황을 잘못 이해하거나 잘못된 규칙을 적용하는 경우다. 예를 들어, 화재 경보가 울렸는데 오작동이라고 판단해서 무시하다가 실제 화재를 놓치는 경우다. 의사가 증상을 잘못 진단해서 엉뚱한 치료를 하는 것도 미스테이크다.
이 세 가지 중에서 미스테이크가 가장 위험하다. 슬립이나 랩스는 본인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지만, 미스테이크는 자신이 올바른 판단을 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THERP 기법의 개발
스웨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THERP(Technique for Human Error Rate Prediction) 기법을 개발한 것이다. 이는 인간의 에러 확률을 정량적으로 계산하는 방법이다.
THERP는 복잡한 작업을 작은 단위로 나누고, 각 단위별로 에러 확률을 계산한 다음, 전체 에러 확률을 구하는 방식이다. 마치 기계의 고장률을 계산하듯이 인간의 실수율도 수치화한 것이다.
예를 들어, 원자력 발전소 운전원이 비상상황에서 취해야 할 10단계 조치가 있다면, 각 단계별 실수 확률을 계산한다. 1단계에서 실수할 확률이 0.01, 2단계에서 0.02라면, 전체적으로 어느 정도 확률로 실수가 일어날지 예측할 수 있다.
THERP에서는 에러 확률에 영향을 주는 **수행형성인자(Performance Shaping Factor, PSF)**도 고려한다. 스트레스 수준, 시간 압박, 교육 정도, 경험, 작업 환경, 절차서의 명확성 등이 모두 PSF에 해당한다.
실제 적용 사례들
스웨인의 휴먼 에러 분류는 다양한 분야에서 실제로 활용되고 있다.
항공 산업에서는 조종사 훈련과 항공기 설계에 적용한다. 조종실 계기판 배치를 할 때 슬립 에러를 줄이도록 중요한 버튼들을 분리 배치한다. 또한 체크리스트를 세분화해서 랩스 에러를 방지한다.
의료 분야에서도 활발히 사용된다. 수술실에서 환자 확인, 수술 부위 확인, 사용 기구 확인 등을 체계화해서 의료사고를 줄인다. "타임아웃" 절차를 통해 수술팀 전체가 한 번 더 확인하는 것도 휴먼 에러 예방법이다.
원자력 분야는 스웨인 이론의 최대 수혜자다. 원전 운전원 교육, 비상절차서 작성, 제어실 설계 등 모든 영역에서 휴먼 에러 분석이 적용된다. 특히 확률론적 안전성 평가(PSA)에서 THERP는 필수 도구가 되었다.
화학 공장에서도 중요하다. 복잡한 공정에서 운전원의 실수가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밸브 조작, 온도 조절, 압력 관리 등 모든 과정에서 휴먼 에러를 고려한 안전 시스템을 만든다.
현대적 발전과 한계
스웨인의 이론은 후속 연구자들에 의해 계속 발전되고 있다. 제임스 리즌의 스위스 치즈 모델, 에릭 홀나겔의 CREAM 기법 등이 대표적이다.
인지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정보처리 과정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휴먼 에러 분류도 더욱 정교해졌다. 주의집중, 기억, 의사결정 과정에서 일어나는 에러의 메커니즘을 더 자세히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컴퓨터 기술의 발전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자동화 시스템이 늘어나면서 인간의 역할이 바뀌었고, 새로운 형태의 에러가 나타났다. 자동화 의존성, 모드 혼동, 상황 인식 상실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스웨인 이론에도 한계는 있다. 개인차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에러 확률이 다를 수 있는데, 이를 평균적인 수치로만 다루기 어렵다.
문화적 요인도 고려하기 어렵다. 서구에서 개발된 이론이다 보니 집단주의 문화권에서는 다른 양상을 보일 수 있다. 권위에 대한 태도, 의사소통 방식, 팀워크 문화 등이 에러에 미치는 영향이 다를 수 있다.
조직 차원의 에러 관리
개인의 실수를 줄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조직 차원에서 에러를 관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스웨인도 이 점을 강조했다.
에러 방지 시스템 구축이 첫 번째다. 중요한 작업에는 이중 확인, 상호 점검, 자동 알림 등의 안전장치를 만든다. 하나의 실수가 바로 사고로 이어지지 않도록 여러 단계의 방어막을 만드는 것이다.
에러 발견 시스템도 중요하다. 실수가 일어났을 때 빨리 발견할 수 있는 모니터링 체계를 만든다. 이상 징후를 알려주는 경보 시스템, 정기적인 점검 절차, 동료들의 상호 감시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에러 회복 시스템은 마지막 보루다. 실수가 일어나더라도 신속하게 회복할 수 있는 비상 절차를 준비한다. 백업 시스템, 비상 대응팀, 복구 매뉴얼 등이 필요하다.
일상생활에서의 적용
스웨인의 휴먼 에러 이론은 일상생활에서도 유용하다. 개인 차원에서 실수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슬립 에러를 줄이려면 주의집중이 중요하다. 중요한 일을 할 때는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집중한다. 또한 비슷해 보이는 것들은 명확히 구분해서 보관한다. 약물을 보관할 때 모양이나 색깔이 비슷한 것들을 따로 두는 것처럼 말이다.
랩스 에러를 막으려면 기억에 의존하지 말고 체크리스트나 알림을 활용한다. 스마트폰의 알림 기능, 포스트잇, 달력 등을 적극 활용한다. 특히 일상적인 일일수록 더 주의해야 한다.
미스테이크를 피하려면 충분한 정보 수집과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 급하다고 성급하게 결정하지 말고, 가능하면 다른 사람의 의견도 들어본다.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겸손한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미래의 발전 방향
AI와 빅데이터 시대에도 휴먼 에러는 여전히 중요한 주제다. 오히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역할이 더 복잡해지고 있다.
예측 기술의 발전으로 에러를 미리 예방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작업자의 생체 신호, 행동 패턴, 작업 환경 등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해서 에러 위험이 높을 때 경고를 주는 시스템이 개발되고 있다.
개인 맞춤형 에러 관리도 가능해질 것이다. 개인의 성격, 경험, 학습 능력 등을 고려해서 맞춤형 교육과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인간-AI 협력 시스템에서 새로운 형태의 에러도 나타날 것이다. AI가 잘못된 판단을 했을 때 인간이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시스템, 반대로 인간의 실수를 AI가 보완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스웨인이 50년 전에 시작한 휴먼 에러 연구는 오늘날에도 계속 발전하고 있다. 그의 기본 아이디어인 "인간의 실수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한다"는 철학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완벽한 인간은 없지만, 완벽에 가까운 시스템은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스웨인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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